People of Honma |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박혜진
성악가, 교수,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박혜진은 이 세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단순한 타이틀 이상의 무게를 지닌 이 자리들은 바카라 이기는 법가로서의 깊이, 교육자로서의 책임, 그리고 리더로서의 통찰을 고루 요구한다. 무엇보다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건 전통에 머무르지 않고 바카라 이기는 법의 문을 대중에게 활짝 연 새로운 시도들이다.
지난 6월 1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세 번째 시민참여형 오페라 공연을 통해 그녀는 또 하나의 ‘공공바카라 이기는 법’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 여운이 채 가시기 전 혼마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박혜진 단장을 만났다.
게스트 에디터 박정희 사진 최근우

성악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어요. 자연스레 바카라 이기는 법 학교를 가는 걸 목표로 뒀죠. 하지만 많은 어린 학생이 그렇듯 반항하는 시기가 찾아오곤 하잖아요. 예원학교 입시를 준비하다가, 어느 날 연습이 너무 하기 싫어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침대에서 만화책을 보다가 어머님께 들켰죠. 심하게 혼나니 정말 그만두고 싶었는데, 그때 피아노 선생님이 제안했어요. “그만두기엔 너무 아깝다. 목소리도 예쁘고 피아노도 잘 치니 성악을 해보자.” 그렇게 노래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의지보다는 우연에 가까웠지만, 입시의 연속 속에서 노래의 진짜 매력을 뒤늦게 알게 됐어요. 훗날 무대에 계속 서다 보니, ‘내가 노래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었구나’라는 걸 깨닫았죠.
예원, 서울예고, 연세대 수석 입학이라는 기록이 있군요. 승부욕이 강한 성격이었나요?
오히려 저는 뚜렷한 야망을 가지기보다 ‘주어진 일에 충실한 아이’였던 것 같아요. 목표를 세우면 끝까지 해내려는 집요함은 있었죠. 그리고 부모님의 헌신도 컸고요. 성악은 타고난 목소리의 영향이 크거든요.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원석을 깎느냐에 따라 품질이 달라지듯, 저도 좋은 재료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해요.
유학 시절 뉴욕이라는 도시는 어떤 자극을 주었나요?
뉴욕은 제게 많은 걸 가르쳐준 도시예요. 단순히 성악을 배우는 것을 넘어서 문화와 다양성 그리고 바카라 이기는 법의 경계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어요. 길거리의 재즈 연주, 센트럴 파크에서의 클래식 공연, 브로드웨이의 뮤지컬까지, ‘바카라 이기는 법은 사람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뉴욕에서 자라난 것 같아요. 만약 제가 유럽에서 공부를 했다면, 오페라나 클래식을 보수적인 관점으로만 대했을 거예요.
국가행사에서의 공연도 많으셨습니다. 어떤 사명감을 갖고 노래를 불렀나요?
그땐 ‘나라의 얼굴’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무대에 서요. 특히 애국가를 부를 때는 단순히 노래를 부른다기보다, 그 순간을 상징하는 정서와 의미를 온전히 담아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껴요. 반면 상업 무대에서는 바카라 이기는 법적인 완성도나 관객의 즐거움과 만족에 좀 더 초점을 맞추게 돼요. 둘 다 소중하지만, 중심을 두는 무게는 분명히 다르죠.
성악가와 교수로서 활동하다 서울시오페라단 단장직에 도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사실 단장이라는 직책은 나이가 더 들어 무대에서 내려온 뒤쯤 해보자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지인과 커피를 마시다가 “혜진아, 너는 경험도 많고 기획력도 좋으니 단장 같은 일 잘할 것 같아”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이 계기가 됐죠. 마침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공모가 나와 준비해 지원했어요.
부임 첫날, 가장 먼저 하신 생각은 무엇이었나요?
‘오페라의 벽을 허물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주위 사람들에게 공연을 보러 오라고 하면, ‘어렵다’, ‘졸릴 것 같다’는 반응이 많았거든요. 이 좋은 장르를 왜 이렇게 멀게 느낄까, 더 친근하게 만들 수는 없을지 고민했어요.
실제로 그런 고민들이 기획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나요?
제가 단장을 맡으면서 내건 공약 중 하나가 거리에서 누구나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야외 오페라’였어요. 또, 미디어아트나 연극 등 다른 장르와 협업해서 관객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연구했어요.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이런 시도가 생소하고 우려 섞인 시선도 있었지만, 저는 늘 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렇게 시민합창단도 탄생한 건가요?
무대에 선 사람도, 객석에 있는 사람도 같은 감정을 나누는 무대를 만들고 싶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노래를 좋아하고 즐기는 국민이 또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전문 연주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과 무대를 함께 만든다는 건 굉장히 많은 준비와 섬세한 배려가 필요한 일이예요. 모두 열정과 의지가 대단하지만 조율해야 하는 것들이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막상 무대에 올랐을 땐 모두가 하나 된 목소리를 내요. 그 순간의 감동은 정말 컸어요. ‘오페라가 이런 힘이 있구나’ 하는 걸 저도 다시 한번 깊이 느끼게 됐죠.
지난 6월 1일에 시민합창단과 함께한 제 3회 광화문광장 야외 오페라 공연도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단장님에게는 어떤 기억으로 남았나요?
관객들의 호평도 기뻤지만 무엇보다 시민 합창단의 반응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특히 연세 지긋한 단원 한 분이 제 손을 꼭 붙잡고 “죽기 전에 이런 무대에 서게 돼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도 울컥하더라고요.

그런 무대가 단장님께는 단순한 공연 이상의 의미였겠네요.
맞아요. 어떤 평가나 바카라 이기는 법보다 함께한 사람들이 진심으로 전해준 감사와 감동이 훨씬 더 크게 와닿았어요.
성악가이자 단장으로서, 하나의 곡이 ‘완성됐다’는 느낌은 어떤 순간에 드시나요?
성악가로서의 완성은 관객과의 교감에서 와요. 슬픈 노래를 부를 때 누군가 눈물을 흘리고, 기쁜 곡에 박수를 치는 걸 보면 ‘통했다’는 느낌이 들죠. 단장으로서는 관객 후기에서 그 완성도를 느껴요. 모두가 좋아할 수는 없지만, ‘오페라가 이렇게 재밌는 장르였구나’ 하는 반응이 있으면 잘 끝난 공연이라고 판단하죠.
공연 전에는 어떤 루틴이나 심리적 준비를 하시나요?
공연을 준비한다는 건 골프 라운딩을 나가는 것과 비슷해요. 반복과 꾸준함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30분은 꼭 노래 연습을 합니다. 제가 직접 노래해야 할 땐, 공연 전에는 아무도 안 만나요. 식사도 혼자 하고 통화도 피하고요. 목 관리를 위해서도 그렇고, 공연 전 어떤 돌발 상황을 피하기 위한 마음가짐이랄까요. 제가 단장으로 참여하는 공연을 준비할 때는 제가 아닌 모두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요.
단장, 성악가, 교수라는 세 역할을 동시에 하시잖아요. 각 역할의 책임감은 어떻게 다르다고 느끼세요?
성악가는 약간 이기적일 필요가 있어요. 몸이 악기니까요. 반면, 단장은 타인을 위한 배려가 기본이에요. 성악가들이 좋은 환경에서 노래할 수 있도록 디테일까지 신경 씁니다. 물병마다 이름을 붙이고, 대기실엔 먹을 수 있는 간식을 준비하고, 짧은 손편지도 써서 전달하기도 해요. 교수로서는 학생의 미래까지 책임져야 하니까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죠.
그럼 자신을 직업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소통하는 바카라 이기는 법가’라고 생각해요. 음악을 통해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사회와 바카라 이기는 법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싶어요
현재의 위치에서 미래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바카라 이기는 법가로서의 창조가 내일의 문화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해요. 젊은 시절엔 프리마돈나로서 세계 무대에 서는 게 꿈이었지만, 단장을 하며 더 큰 기쁨을 깊게 느끼게 되었어요. 리더로서는 오페라 관객을 더 많이 늘리고, 젊은 성악가들이 무대에 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제 목표예요.
오페라의 ‘대중화’에 대해 이야기 많이 하셨는데, 어떤 비전을 갖고 계세요?
‘모두가 오페라를 들어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뮤지컬처럼 더 많은 관객이 오페라를 즐길 수 있게 하고 싶어요. 한국엔 정말 뛰어난 성악가들이 많아요. 이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더 많이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관객이 늘어야 무대가 생기고 무대가 있어야 바카라 이기는 법가가 자라거든요.
어떤 리더가 되고 싶나요?
포용력 있는 리더요. 열린 마음으로 모든 구성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 INFJ인 제게 쉽지 않은 덕목이지만, 단장을 맡으며 많이 변했어요. 힘든 순간에도 대화를 통해 풀어가려는 자세를 배우고 있어요. 무엇보다 진심과 진실성이야말로 리더의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믿습니다.
